역사

조선을 팔아먹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와 윌리엄 태프트

더 멋진친구 2019. 2. 6. 11:53

시어도어 루스벨트


요약 미국의 제26대 대통령. 1901년 전임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의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하여 1909년까지 재임하였으며, 공화당 소속이었다. 또 러일전쟁의 중재, 모로코 분쟁 해결 공로 등으로 1907년 노벨 평화상(Nobel Peace Prize)을 수상하였다.

미국자연사박물관 루스벨트 동상

미국자연사박물관 루스벨트 동상

출생-사망 1858.10.27 ~ 1919.1.6
국적 미국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미국 뉴욕주() 뉴욕시
주요수상 노벨평화상(1907)

1858년 10월 27일 뉴욕주() 뉴욕시에서 출생하였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1880년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앨리스 해서웨이 리(Alice Hathaway Lee)와 결혼 했으나 1884년 사별했다. 23세 때 뉴욕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타락한 파벌정치에 저항하고 소신있는 행동으로 겁 없는 의원으로도 명성을 얻었지만 동시에 공화당 내에서 많은 적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1884년 일시 정계를 물러나 서부지역의 목장에서 집필을 하다가, 1886년 10월 뉴욕시장에 출마하여 낙선하였고, 12월 에디스 커밋 캐로우(Edith Kermit Carow)와 재혼했다.

1889~1895년 연방시민위원회(United States Civil Service Commission)위원으로 재직하였다. 1897년 해군부 차관으로 임명 되면서 미 해군의 보강을 역설하였고 스페인과의 전쟁을 강력히 주장했다. 1898년 전쟁이 선포되자 '러프라이더(Rough Rider) 연대'라는 별명을 가진 의용군을 조직하여 쿠바에 출정, 케틀 힐(Kettle Hill)전투와 산 후안(San Juan Hill)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전역 후 1899년 1월부터 뉴욕 주지사로 재직하였고 재임기간 동안 그는 인맥과 연줄로 채용된 공직자 및 부패하고 무능력한 공직자와 경찰 등을 숙정()하고 법인면허세와 공무원 공개채용제도를 확립하였다. 19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윌리엄 매킨리의 러닝메이트로 지명되어 당선되었으나 매킨리의 사망으로 1901년 9월 제2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1904년 재선되었다.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그는 특정집단에 대한 특혜를 방지하기 위해 정부가 나서 경제주체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조정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신념을 견지했다. 이에 따라 1902년 석탄 스트라이크를 조정하여 물가와 산업 분야에 대해 정부가 적극, 개입 간섭하는 선례()를 만들었으며, ‘셔먼독점금지법(Sherman Antitrust Act)’을 부활시켜, 거대 철도회사인 노던 시큐어리티사의 해체를 필두로 이후 7년 동안 당시 최대의 트러스트인 스탠더드 오일 및 노던 증권, 모건 철강 등 트러스트들의 연속 해체를 가져왔다. 그밖에 철도회사의 리베이트 관행을 금하는 엘킨스법(Elkins Act)(1903), 철도회사 운임을 규제하는 헵번법(1906), 식육업체를 비롯한 식품재벌들의 비리를 막기 위한 육류검사법Meat Inspect Act)및 식품의약규제법(Pure Food and Drug Act)등을 입법하므로써 국민들의 반재벌 정서에 부합했으며 대통령의 위상도 높이게 되었다. 또한 환경보존에 앞장 서 서부지역에 광활한 국유림 지대를 조성했고 공공목적으로만 사용하도록 용도를 제한했으며 대규모 치수관개사업도 추진했다.

그는 보다 적극적으로 미국을 국제정치 무대로 이끌었다. 그 시작은 먼로주의의 확대 해석(먼로주의의 수정)이었으며 그 내용은 아메리카 국가들의 내정 문제에 비() 아메리카인의 개입을 금지하고 미국이 중남미 지역에 개입할 수 있는 독점적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베네수엘라 문제, 카리브해 문제, 파나마운하 건설 등 강력한 외교를 추진하였다. 특히 파나마 운하 건설을 위하여 1903년 파나마를 콜럼비아로 부터 독립하도록 후원하였고, 파나마 정부는 막대한 자금 지원과 군사보호를 내건 미국에게 파나마 운하 건설, 운영, 보호권을 부여한다는 협정을 체결했다. 또한 국제문제에도 개입하여 중재자 역할을 맡았다. 1905년 프랑스와 독일을 중재해 모로코 분쟁을 해결했으며, 포츠머스회담을 통하여 러-일 전쟁 해결의 중재역을 맡았다. 이로써 1906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육군장관 태프트를 도쿄로 보내 '카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음으로써 일본은 조선을, 미국은 필리핀을 지배하기로 합의하는 등 힘의 논리에 충실한 면도 있었다.

1910년 정계로 복귀하여 1912년 제3당인 진보당(Progressive Party)을 조직하고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의 T.W.윌슨에게 패하였다. 1919년 1월 6일 뉴욕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어도어 루스벨트 [Theodore Roosevelt] (두산백과)



윌리엄 태프트



요약 1905년 7월 미국과 일본이 필리핀과 대한제국에 대한 서로의 지배를 인정한 협약으로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들의 승인 아래 한반도의 식민화를 노골적으로 추진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일시 1905년 07월 29일
장소 도쿄
목적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적 지위 인정
가입국가 미국·일본

1905년 7월 29일에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이자 임시외무대신이었던 가쓰라 다로[]와 미국의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후에 미국의 제 27대 대통령이 됨) 사이에 맺어진 비밀 협약이다. 가쓰라-태프트 협정, 가쓰라-태프트 각서(Taft Katsura Memorandum)라고도 한다.

러일전쟁 중이던 1905년 7월 미국의 육군장관 태프트는 필리핀을 방문하던 도중에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의 특사로 일본을 방문했다. 1905년 7월 27일 도쿄에서 가쓰라 총리와 기밀 회의를 열어 동아시아 정세에 관한 주요 의제를 논의하였고, 7월 29일에 회의의 주요 내용을 담은 합의 각서를 작성했다. 태프트는 이 합의 각서의 내용을 곧바로 당시 국무장관이던 엘리후 루트(Elihu Root)에게 전보로 알렸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7월 31일 그 내용을 승인하였다. 필리핀 마닐라에 머물고 있던 태프트는 8월 7일 가쓰라 총리에게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승인 사실을 알렸다. 가쓰라 총리는 다음날 러시아와의 강화협상 전권대표로 미국 포츠머스(Portsmouth)로 가 있던 고무라 주타로[] 외상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이로써 일본과 미국의 합의 과정이 완료되었다.

이 밀약의 내용은 서명된 문서나 조약의 형태가 아니라 서로의 합의를 기록한 각서로만 존재하며, 그 내용도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다 1924년 미국의 외교사가인 타일러 데닛(Tyler Dennett)이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문서들을 연구하다가 발견해 《커런트 히스토리(Current History)》 지에 발표하면서 그 실체가 드러났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될 당시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 중이었는데, 그해 5월 27일 대한해협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해군이 큰 전과를 거두면서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미 러시아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강화 권고를 받아들인 상황이었다. 따라서 가쓰라와 태프트의 기밀회의에서는 러일전쟁 이후의 동아시아 정세에 관한 안건들이 논의되었고, 두 나라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사항에 합의하였다.

첫째, 미국이 필리핀을 통치하고, 일본은 필리핀을 침략할 의도를 갖지 않는다.
둘째, 극동의 평화 유지를 위해 미국·영국·일본은 동맹관계를 확보해야 한다.
셋째,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지배적 지위를 인정한다.

특히 가쓰라 총리는 대한제국 정부가 러일전쟁의 직접 원인이었다고 주장하면서 한반도 문제의 폭넓은 해결이 러일전쟁의 논리적인 결과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대한제국 정부가 단독으로 방치되면 다시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어 전쟁이 발발할 수 있으므로,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가 임의로 다른 나라와 조약을 체결할 수 없게 막아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태프트 특사는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protectorate)으로 되는 것이 동아시아의 안정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동의했으며, 루스벨트 대통령도 자신과 같은 생각일 것으로 확신한다고 밝혔다.

이처럼 이 밀약은 일본과 미국이 한반도와 필리핀에 대한 서로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영국·일본의 동맹을 강화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에게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은 일본은 1905년 8월 12일 제2차 영일동맹을 맺어 영국에게도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해 러시아에게도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이처럼 국제 사회에서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은 일본은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야욕을 노골화하여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보호국의 지위로 전락시켰으며, 1910년 8월 29일에는 주권을 완전히 빼앗았다. 이처럼 미국과 일본 사이에 이루어진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의 동의를 얻어 한반도의 식민화를 노골적으로 추진해가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쓰라-태프트밀약 [The Katsura-Taft Agreement]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