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역사

잉카제국의 멸망

더 멋진친구 2018. 10. 16. 13:04

파이치치의 전설

파이치치의 전설에는,잔인무도한 스페인 군대에 의해 황제가 처형되고 나라를 잃은 잉카 민족의 슬픔이 서려 있다.

태양을 으뜸신으로 섬긴 잉카족.‘잉카’는 태양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황제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잉카제국은 안데스 지방에 있었던 여러 국가 가운데 제일 늦게 세워진 왕국이었다.그런데 13세기에 망코 카파크라는 왕이 쿠스코에 도읍을 정한 뒤부터 힘을 기르기 시작했다.망코는 태양신전을 쌓았고,태양의 아들로 숭앙되었다.15세기 중반 제9대 황제 파차쿠티 때에 잉카는 둘레의 여러 종족을 정복해 오늘날의 페루·콜롬비아·칠레를 아우르는 큰 나라를 세웠다.전설에 따르면 황제는 아마존 강이 시작되는 밀림 깊숙한 곳까지 군대를 이끌고 갔다.원정군은 그곳에서 금광을 찾았는데 흙을 한움큼 쥐면 금가루가 잔뜩 섞여 있었다고 한다.이때부터 잉카는 황금시대를 누리게 되었다고 한다.

뒷날 스페인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군인 180명을 이끌고 쿠스코를 점령했을 때 태양의 신전 돌벽에는 황금덩어리가 여기저기 박혀 있었고 해·달·별의 제단에는 황금이 두껍게 입혀 있었다.또 황금으로 만든 황제 상(像)이 18개나 되었다고 한다. 잉카는 참으로 어처구니없이 무너졌다.아타왈파 황제의 근위대 5,000명이 난생 처음 보는 이상한 짐승(말)과 천둥소리를 내는 막대기(총)에 놀라 180명밖에 안되는 스페인 군인과 말 27마리에게 전멸한 것이다.

1531년 11월16일,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스페인 왕의 사절로 왔다고 속이자 아타왈파 황제는 방심하고 그를 만났다.황제의 근위병들은 무기를 들지 않은 맨손이었다.스페인 종군 신부가 성경을 건네며 “여기에 손을 얹고 하나님과 스페인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말하자 황제는 성경을 내동댕이쳤다.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스페인군의 총이 일제히 불을 뿜었고 창기병이 말을 몰고 짓쳐 나왔다. 사로잡힌 아타왈파 황제는 자기가 갇힌 방을 가득 채울 만큼 황금을 줄 테니 살려 달라고 사정했다.그 방은 높이가 7m,너비가 6m나 되었다.피사로가 허락하자 두 달 만에 황금 200상자,은 20상자,보석 60상자가 모였다.피사로는 그것들을 받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그가 황제를 불태워 죽이려고 하자 황제는 기독교도가 되겠다고 애원해 겨우 화형을 면하고 목 졸려 죽었다.슬픔에 젖은 잉카인들은 분노에 떨며 뿔뿔이 흩어졌다.그들 대부분은 밀림으로 숨었는데 그 가운데 일부가 황금을 숨긴 파이치치로 갔다.

1540년 피사로는 파이치치와 대서양쪽으로 나가는 길을 찾으려고 탐험대를 만들었다. 그는 자기 동생 곤잘로 피사로를 대장으로 삼아 군인 200명과 원주민 4,000명을 보냈다. 안데스산맥을 넘어 동쪽으로 나아간 탐험대는 밀림을 헤매다가 여덟 달 만에 물줄기 하나를 찾았다. 아마존 상류 나포 강이었다. 사람과 말이 모두 지치자 피사로는 오레야나로 하여금 밀림을 정찰하고 먹을 것을 구해 오라고 명령했다. 오레야나는 병사 70여 명을 이끌고 강을 따라 내려갔다. 자꾸 가니 큰 강이 나타났다.

지친 몸으로 노를 젓던 오레야나 일행은 도중에 여자들만으로 된 인디오들을 만났다. 그 여자들은 밀림 속을 누비며 활을 쏘아댔다.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난 오레야나는 그 여자들이야말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구의 끝에 사는 용맹스러운 아마존’이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이 강은 아마존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오레야나는 끝내 대서양까지 나아가 카리브 해에 있는 스페인 땅으로 돌아갔으나 열여덟 달이나 그를 기다리던 피사로는 지치고 말았다. 그 사이 원주민들은 뿔뿔이 달아났고,스페인 군인도 반 넘게 죽어 탐험대는 빈손으로 쿠스코에 돌아갔다. 그 뒤로 500년이 흐르는 동안 파이치치를 찾아 안데스산맥 동쪽에 발자국을 남긴 사람들은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파이치치를 찾는 탐험대는 먼저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쯤 날아 잉카의 도읍지였던 쿠스코로 가야 한다. 산소가 적어 숨이 찬 해발 3,400m 고지의 쿠스코에서 다시 북쪽으로 4,500m 산을 넘으면 판차코차 지방으로 들어가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여기서부터 거대한 아마존 밀림이 방문객을 맞는다. 아홉 나라를 거치며 장장 6,400㎞를 도도히 흘러내려 대서양에 1초마다 17만5,000톤씩 민물을 쏟아붓는 아마존 강. 이 강 200여 갈래가 아마존 분지 700만㎢를 거미줄같이 꿰고,거기에 지구 전체 산소의 10%를 대는 열대 밀림이 끝없이 펼쳐진다. 강물에는 아무리 큰 동물도 순식간에 먹어치우는 물고기떼 피라냐가 살며,두꺼운 담요도 뚫는 큰 모기떼는 사람이 잠깐 걸음을 멈추면 사정없이 달려들어 피를 빤다. 독사와 독벌레,몇 달씩 퍼붓는 장대비와 해가 보이지 않는 수림.

어떤 사람도 이곳에서 열흘 넘게 버티지는 못한다. 어떤 탐험대도 이 밀림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20세기에 잉카의 유적들이 여러 군데 발굴되었지만 파이치치를 찾는 일은 아직 요원하다

마추 피추



안데스와 아마존을 헤맨 탐험가 가운데에는 비록 파이치치는 아닐지라도 유적을 발견한 사람도 몇 있다. 오늘날 남아메리카의 고대 유적지 가운데 관광객을 제일 많이 끌어모으는 마추픽추(Machu Picchu)를 발견한 하이럼 빙엄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잉카인들은 글자·쇠·화약·바퀴를 몰랐지만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강한 군대를 유지했다. 제국은 태평양 연안과 안데스산맥을 따라 남북을 관통하는 두 갈래 길(잉카 로드)을 2만㎞나 만들어 광대한 영토를 통제했다. 황제의 명령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까지 두루 미쳐 새 한 마리도 황제의 명령 없이는 날지 않는다고 했다.

잉카인이 돌을 다룬 기술은 신기(神技)에 가까웠다. 그들은 20톤이나 나가는 돌을 바위산에서 잘라내 수십 ㎞ 떨어진 산 위로 날라다가 신전과 집을 지었는데,면돗날도 들이밀 틈 없이 돌을 잘 쌓았다(그들이 사용한 가장 큰 돌은 높이 8.53m 무게 361톤이다). 평야가 적었지만 산비탈을 계단처럼 깎아 옥수수를 경작함으로써 그들은 넉넉히 먹고 살았고,구리를 쇠만큼 단단하게 제련해 썼는데 그 방법은 지금도 풀리지 않고 있다.

이렇듯 강성했던 잉카 제국은 겨우 100여년 만에 스페인 군대에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들의 문명과 패망과 저항에 얽힌 수많은 사연을 집약해 보여 주는 최대 유적이 바로 안데스 산맥 밀림 속의 해발 2,400m 바위산 꼭대기에 남아 있는 옛 도시 맞추픽추이다.

‘…우리는 비탈에 납작 붙어서 아래로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땅에 손가락을 찔러 꽂은 뒤 미끄러운 풀을 밀어 헤치면서 몸을 위쪽으로 끌어올렸다. 아득한 낭떠러지 저 아래에서는 우리가 밧줄을 잡고 건너온 우루밤바강의 성난 급류가 하얀 거품을 일으키고 있었다. 인디언 안내인이 이 근처에는 사냥감을 뒤에서 공격하는 페루드란스 독사가 많다고 신음하듯이 일러 주었다.’

미국 예일대학에서 라틴아메리카 역사를 가르치던 서른다섯살 난 하이럼 빙엄이 마추픽추를 발견한 1911년 7월24일의 일을 기록한 글이다. 탐험대는 빙엄과 그의 대학 동료 두 사람,통역과 길안내를 맡은 페루군 하사관 1명,거기에 노새 몇 마리. 그들은 잉카 제국의 마지막 수도였던 빌카밤바를 찾으려고 들끓는 모기와 지독한 더위와 위험한 급류를 무릅쓰고 우루밤바강을 따라 폐허들을 모조리 조사하고 있었다. 어느날 일행이 빌카밤바 계곡에서 야영하고 있을 때 한 인디언이 나타나 그들의 바로 앞에 깎아지른 듯이 솟은 바위산 등성이에 거대한 폐허가 있다고 알려 주었다.

‘꽤 높이 올라갔는데도 폐허 같은 것은 없었다. 모두가 몹시 지쳤다. 그때 인디언 몇 사람이 샘물을 담은 호리병을 가지고 다가왔다. 물을 정신없이 들이키고 가슴 가득히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자 정신이 한결 맑아졌다. 인디언들은 조금 더 가서 산모퉁이를 돌면 폐허가 있다면서 한 소년을 딸려 주었다….’

빙엄 일행이 산모퉁이를 돌아서자 과연 잉카 시대의 계단식 경작지가 보이고 돌 건축물이 나타났다. 거대한 계단 같은 것을 몇 단 겹쳐 쌓은 큰 건축물은 나아갈수록 더 많아졌다. 모두 길이 30m가 넘는 돌벽이 3m 높이로 쌓여 있었다. 한 건축물의 끝까지 걸어가니 맞은편 나무가 이끼 낀 돌벽에 솟아 있었다.

‘엄청나게 큰 돌들이 서로 꽉 맞물려 있었다. 그 벽은 가옥의 일부였다. 벽은 옆에도,그 맞은편에도 있었다. 바위 선반 아래에 동굴이 있었다. 벽에 벽감이 나란히 설치된 왕족의 무덤이었다. 그 위쪽에는 쿠스코에 있는 태양의 신전처럼 바깥 벽이 경사진 반원형 건물이 있었다. 돌계단은 광장으로 이어졌고,거기에는 흰 화강암으로 지은 대사원이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가까이 있는 아름다운 맞배지붕 건물이 제사장의 주거주지였으리라. 비탈 아래에는 건물들이 미로처럼 배열되어 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안데스산 중에 해발 4,570m 높이로 우뚝 솟은 바위산. 그 중턱에 만여명이 살 수 있는 비밀 도시가 있었다니! 바퀴를 모르던 잉카인들은 흙과 돌을 사람이 지고 날라다가 이 도시를 세웠다. 길이가 수백m나 되는 축대를 100개나 쌓고,거기에 흰 화강암을 빈틈없이 이어 쌓은 벽과 집들. 샘에서 수돗물을 끌고,계단식 밭을 일구어 외부의 도움없이 살 수 있도록 신전과 묘지까지도 갖춘 완벽한 도시.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바깥 세상과 소식을 끊은 채 수십 년 동안 살다가 늙어 죽은 듯했다. 어떤 군대라도 막아낼 수 있도록 3면이 낭떠러지인 이 요새는,그 뒤로 400년 동안이나 사람 그림자가 얼씬하지 못한 채 두꺼운 이끼에 덮여 있었다. 빙엄은 빌카밤바를 찾았다고 확신했다. 눈앞의 옛 도시가 스페인군에 쫓긴 잉카의 황제의 피난처이자 저항의 근거지로 삼은 최후의 수도라고.

산 위에서는 계곡이 다 내려다보이지만 계곡에서는 어디에서 올려다보아도 보이지 않는 요새. 바위산 꼭대기에 있으면서도 천여 명이 상주한 자급자족 도시. 빌카밤바 계곡 일대에 흩어져 있는 만여 명을 관장한 거점 도시. 신전 중심의 시설로 가득한 신성한 도시. 마추픽추는 누가 세웠고 언제 버려졌을까.

잉카의 초대 황제 비라코차 잉카가 안데스산맥 일대의 여러 부족을 합병해 제국을 세운 때는 1438년.계속 영토를 넓히고 도로를 닦고 제도를 정비해 오던 잉카제국은 제12대 후아이나 카팍 황제가 죽자 내분에 휩싸였다.적자인 후아스카르와 서자인 아타왈파의 싸움에서 아타왈파가 이겨 13대 황제가 되었는데,내전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스페인군에게 무너졌다.

스페인군의 꼭두각시로 황제에 오른 망코 잉카는 기회를 엿보다가 수십만 명을 동원해 봉기했으나 실패했다.그는 우루밤바강 기슭의 빌카밤바 요새로 도망가 스페인군에 맞섰지만 그마저도 함락되었다. 끈질기게 저항하던 망코 잉카가 살해되고 1571년 마지막 잉카 투팍 아마루가 스페인군에 처형되자 40여년에 걸친 잉카인들의 저항은 막을 내렸다.그로부터 340년이 지난 1911년 하이럼 빙엄이 마추픽추를 세상에 알리자 사람들은 마추픽추야말로 망코 잉카가 머물렀던 빌카밤바라고 믿었다.그러나 마추픽추는 잉카인이 처음 세운 도시는 아니었다.1912년 빙엄의 발굴보고서에도 잉카시대 이전에 만든 옹기와 접시가 많다고 나와 있지만,1988년 카본 테스트를 해보니 마추픽추에는 서기 800년에 정착해 산 사람들이 있었다.그래서 ‘잉카 이전에 세워져 버려졌던 마추픽추를,쫓기던 망코 잉카가 다시 건설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그 밖에도 마추픽추는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을 몇 가지 지니고 있다.

▲태양의 신전에 있는 지하계단이 중간에 끊겼다.혹시 잉카의 보물이 감추어진 통로가 무너져내린 것은 아닌가.

▲황금이 모두 사라진 까닭은? 20세기 이전에 도굴된 것이 아닐까? 실제로 빙엄이 마추픽추를 발견하기 이전인 1894년에 두 탐험가가 이곳을 다녀갔고,세 사람이 바위에 자기들 이름을 새겨 놓았다.

▲마추픽추에서 나온 미라 중에 남성 미라가 거의 없다.남자들은 모두 전쟁에서 죽었을까? 100명이 넘는 ‘태양의 처녀’가 매장되었는데,잉카 병사들은 왜 그들을 데리고 도망치지 않았을까? 유물과 미라만 놓고 추측한다면 마추픽추는 방어요새가 아니라 여사제들이 태양의 신을 섬긴 금남(禁男)의 종교도시였다고 볼 수도 있다.

1911년 빙엄이 왕궁과 신전 따위를 복원한 뒤로 1956년부터 시작된 대규모 발굴과 복원이 1974년에 끝나 마추픽추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고대유적 관광지가 되었다.

마노아(Manoa)라는 황금도시

아마존에는 엘도라도와 파이치치 말고도 황금 도시가 또 있다. 페루에 예부터 전해오는 전설 가운데,남아메리카 한가운데 아마존 밀림에서 아마존 강을 따라 페루로 왔다가 잉카군에게 쫓겨간 챙카족 이야기가 있다. 그 부족의 수도가 마노아(Manoa)라는 황금도시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75년 전 온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포셋 탐험대 사건이 있다. ‘잃어버린 옛 도시’를 찾으러 아마존 밀림으로 들어갔다가 사라진 20세기 탐험 사상 최대의 미스터리이다.

1920년 가을. 영국의 육군 대령이자 이름 난 탐험가인 코로넬 퍼시 포셋의 집에 한 친구가 찾아왔다. 친구가 내민 작은 물건을 무심코 받아든 포셋은 진저리를 치며 그것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원시인 같은 모습을 새긴 그 자그마한 석상(石像)을 손에 쥐자 갑자기 전류가 흐른 듯이 찌릿하며 온몸이 떨렸던 것이다. 석상 높이는 기껏 25㎝. 가슴에는 이상한 글자 같은 것이 새겨져 있었다. 포셋이 알 만한 사람을 모두 찾아다녀 보았지만 그 석상에 관해 무슨 말이든 해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상한 조각. 포셋은 문득 그것이 먼 옛날의 수수께끼 왕국에서 만들어졌을지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얼마 뒤 그는 덴마크의 룬트 박사가 쓴 남아메리카 지리학 보고서에서 흥미 있는 기록을 찾아냈다.

‘…까마득한 옛날 지구의 대륙들이 모두 바다에 잠겼을 때 브라질 지역만 기적같이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아마존 분지는 제일 오래된 원시 대륙이라고 할 수 있다.…’

1921년 6월 포셋은 브라질로 건너가 여러 가지 기록을 조사했다. 어느 날 그는 도서관의 서고에서 케케묵은 책을 발견했다. ‘알바레스의 브라질 탐험’이었다.

‘1516년 포르투갈의 알바레스가 폭풍에 휘말렸다가 기적같이 살아났다. 그가 상륙한 곳은 브라질의 사라도르였다. 그는 바닷가에서 야만인에게 붙잡혔으나,추장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세월이 흘러 그의 아들 무리베카가 아마존 깊숙한 곳에서 엄청난 금광을 발견했다.
무리베카의 아들 디아스 때에 이르러 금광 소문은 포르투갈에까지 퍼졌다. 포르투갈 왕은 온갖 수단을 써서 금광을 빼앗으려 했으나,디아스는 끝내 금광 있는 곳을 대지 않고 죽었다. 왕은 금광을 찾으려고 두번이나 탐험대를 보냈으나 3,000명 중에 살아 돌아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포셋은 또 다른 책을 찾아냈다. 그것은 ‘옛 도시의 유적에 관한 보고서’라는 제목이 붙은,1753년에 만든 책이었다.

‘1743년 포르투갈의 프란시스코가 디아스의 금광을 찾으러 브라질에 건너왔다. 5년 동안 중부 브라질을 헤매던 탐험대는 어느날 높은 벼랑에 서게 되었다. 그들의 눈 아래에는 놀랍게도 어마어마한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탐험대가 성 안으로 들어가보니 그 큰 도시에는 단 한 사람의 그림자도 없었다. 특이한 것은 궁전으로 보이는 건물벽이 온통 알 수 없는 글자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프란시스코는 그 글자들을 베껴 부랴부랴 그곳을 빠져나왔다. 포르투갈로 돌아온 프란시스코는 1,400명의 탐험대를 만들어 다시 버려진 도시로 갔다. 그런데 믿을 수 없게도 그 많은 탐험대원이 밀림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남은 것은 프란시스코가 처음에 베껴온 수수께끼 같은 문자뿐이었다.

보고서에는 그 알 수 없는 글자들이 나와 있었다. 그것을 본 포셋은 너무나 놀라 한동안 넋을 잃고 말았다. 프란시스코가 사라진 도시에서 베껴 왔다는 그 글자들은 바로 포셋이 얼마전 친구로부터 얻은 석상의 가슴에 새겨진 글자와 똑같았다. 포셋은 서둘러 브라질 정부에 발굴 허가를 신청했다. 그러자 브라질 관리는 손을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그 도시는 유령도시입니다. 우리 정부도 78년 전에 그 보고서를 보고 탐험대를 보냈는데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포셋의 마음은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탐험대를 만들어 리우데자네이루를 떠났다. 그가 아마존의 한 샛강을 뗏목으로 거슬러올라 아마존 분지로 접어들 무렵 신문에 그 사실이 보도됐다. 포셋은 훌륭한 탐험가이자 측량기사였으므로 누구도 그가 성공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포셋은 한 이름없는 폭포에서 그가 탄 뗏목이 떨어지는 바람에 겨우 목숨만 건져 돌아왔다. 그런데 성과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돌아오는 길에 어느 마을에서 밀림 속에 사람이 살지 않는 도시가 있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1925년 3월 포셋은 두번째 탐험에 나섰다. 대원 30명과 말 20마리가 동원된 꽤 큰 탐험대였다. 그는 아마존 강의 갈래인 타파조스와 싱구 강 상류의 마투그로수라고 불리는 대밀림 한복판에 잃어버린 도시가 있다고 생각했다. 포셋이 쿠야바를 떠난 지 두 달쯤 되었을 때다.탐험대원 가운데 토박이 인디오들이 더 못 가겠다고 우겼다.그들은 옛 도시를 탐험하면 악마로부터 저주를 받는다며 막무가내로 버텼다.포셋은 할 수 없이 열사람을 돌려보내며 그들 편에 편지를 보냈다.

‘나는 지금 남위 11도 43분,서경 54도 53분을 지나고 있습니다.모든 일이 별 탈 없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어느 탐험보다도 큰 사명감을 느끼고 있으므로 기어코 옛 도시를 찾고 돌아가겠습니다.기쁜 소식을 기대하십시오. 1925년 5월25일 포셋.’

이 편지가 포셋이 문명 세계에 전한 마지막 소식이 되었다.그 뒤로 포셋 탐험대를 본 사람은 없다.영국 신문들이 이 사건을 크게 다루고,브라질 정부가 수색대를 다섯 차례나 보냈지만,감쪽같이 사라진 탐험대는 어디에도 자취를 남기지 않았다.

잉카 수탈의 역사

엘도라도,파이치치,마노아….아마존에 이처럼 황금에 관한 전설이 많은 것은,아마존이 유럽인들에게 수탈당한 역사와도 관련이 깊다. 유럽인들은 신세계에서 온갖 산물(産物)과 보화를 약탈하고,잉카·아스테카 왕국과 그들의 문명을 멸망시켰다.그리고 카리브해에 있는 섬들과 아마존 유역에 사는 인디오들을 씨를 말릴 정도로 살육했다.‘황금을 찾아서’라는 가슴 설레는 모험담의 이면에 ‘탐험’이라는 허울을 씌워 저지른 ‘빼앗음’의 역사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북아메리카 탐험사에서,가톨릭 수도사를 앞세운 스페인군은 가는 곳마다 십자가를 세우고 하나님과 국왕을 찬양한 뒤 인디언 마을을 짓밟았다.그들은 인디언들에게 다짜고짜 하나님을 믿으라고 윽박질렀는데,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불태워 죽였다.

1539년 플로리다에 상륙한 에르난도 데 소토는 인디언들을 겁주려고 신대륙에 없었던 결핵·천연두·홍역·콜레라를 퍼뜨렸다.죄없는 인디언들은 영문도 모르고 벌레처럼 죽어갔다.결국 콜럼버스가 처음 서인도 제도에 상륙했을 때 100만을 헤아리던 카리브 지역의 인디언은 50년이 지나자 5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

아마존강 유역의 인디오 역시 비슷한 길을 걸었다.어떤 조사에 따르면,푸투마요강 유역에서는 1900∼1911년 고무 4000톤을 생산하는 데 동원된 인디오 가운데 3만명이 죽었다고 한다.근 100년 동안 아마존의 인디오 부족은 무려 90개가 사라져 버렸고,나머지 20여부족도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한때 500만∼600만을 헤아리던 인디오들은 오늘날 겨우 2만명밖에 남지 않았다.

아마존의 인디언들은 문명 세계와 동떨어져 살아온 덕분에 인간이 애초에 가졌던 착하고 순박한 마음씨를 그대로 지녀왔다. 무더위·폭우·맹수·독벌레 등 혹독한 자연 환경에 시달리면서도 나름의 방식으로 생존해온 이들에게 불행이 닥친 것은 문명인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스페인의 탐험이 실패로 끝난 뒤로 수백년 동안 잊혀졌던 아마존은 19세기에 들어서자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 브라질 상인들이 밀림에서 황금보다 더 값진 고무나무를 발견하면서부터다. 방수 신발을 비롯해 고무로 만든 온갖 제품이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1888년에 존 보이드 던롭이라는 사람이 공기 타이어를 만들어 내자 고무값은 30배나 뛰었다. 화물선들이 아마존강을 거슬러 마나우스항으로 몰려들었고,고무를 채취하고 배에 싣기 위해 숱한 인디언이 노예로 잡혀 왔다. 몇천명밖에 살지 않던 마나우스항구는 갑자기 세계에서 제일 부유하고 사치한 사람들이 5만명이나 사는 도시로 바뀌었다. 하루 아침에 부자가 된 사람들은 이탈리아 대리석과 프랑스 가구를 유럽에서 들여왔고,비단옷을 유럽의 세탁소로 보냈다. 고무나무 씨가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로 유출되는 바람에 마나우스의 번영은 30년 만에 끝났다. 그러나 그 30년 동안에 아마존의 인디언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백인들은 밀림에 고무농장을 세우고 인간 사냥꾼을 동원해 인디언을 마구 잡아들였다. 인디언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고무나무에서 즙을 받으려고 날마다 10㎞가 넘게 밀림을 헤매다 죽어갔다. 백인들은 이들을 채찍으로 갈기거나 며칠씩 나무에 비끄러매어 두었다. 맹수와 독사가 들끓는 곳에 사람을 묶어둔다는 것은 얼마나 잔인한 짓인가. 그뿐이 아니었다. 농장주들은 손님을 초대해 파티를 할 때 인디언들을 나무에 묶어 표적으로 삼고 총을 쏘면서 즐겼다. 또 모기약이라고 속여 인디언들의 몸에 석유를 바르게 하고는 불을 붙여 타죽는 모습을 구경했다.

산 마르틴 유적은 고고학자들이 예측하는 대로 엘도라도일까? 파이치치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과학의 힘으로 황금 도시 마노아를 찾을 수는 없을까? 인간의 탐욕이 온갖 비극을 만들어낸 아마존 밀림에서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옛 문명의 흔적이 발견될 것이다. 그 중에서 마추픽추를 능가하는 유적이 나오거나,엘도라도와 파이치치와 마노아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지 모른다. 그러나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음의 길로 내몬 황금이 이제 와서 발굴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2003.11.04. 10:51

출처
http://www.dol.pe.kr/civilization/